Park Hayne


Intro

글로리홀 박혜인


Episode.1

사실 미술반 인원을 충원해야 했던 거예요.


Episode.2

매료시키는 불, 글로리홀


Episode.3

연결의 매개체


Episode.4

독일에서 알게 된 취향


Episode.5

양산화와 정체성


Episode.6

헌신적인 가치


Episode.7

도파민


Episode.8

덥고 습했던 아지랑이 같은 시절


Episode.9

박혜인의 로피스: 유려한 생명체







Intro

글로리홀 박혜인



박혜인을 만나고 오면서, 그녀의 세계가 얼마나 커질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작은 계기와 이야기로 시작하여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 나아가고 있었다. 질문과 해답들을 쌓아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박혜인의 앞으로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Episode.1  사실 미술반 인원을 충원해야 했던 거예요.



Q.
미술은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요.
A.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술을 해보지 않겠냐고 선생님이 제안하셨어요. 제가 잘해서 그렇게 말씀해주신 줄 알았는데, 사실 미술반 인원을 충원해야 했던 거예요. 학생들이 모여야 운영이 되니까 랜덤으로 물어봤던 거죠. (웃음)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었을 때라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반에 들어갔어요. 미술 입시를 하면서 이대를 준비했는데, 떨어져서 다른 대학에서 1년 동안 열심히 놀고, 미팅도 하고, 영화 동아리도 하다가 결국 한예종에 갔고요.

글로리홀을 하기 전엔 드로잉 작업을 주로 했고, 직후에도 어떤 조명을 만들고 싶은지와 같은 컨셉츄얼한 드로잉을 많이 했어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동물에 관심이 많은데, 여기 보면 12년 키운 우리 꾸룩이도 있어요.






Episode.2  매료시키는 불: 글로리홀



Q.
드로잉 작업으로 시작하셨군요. 유리공예는 어떻게 하게 됐나요?
A.
학부 시절에는 설치, 영상, 드로잉 작업처럼 학교에서 추구하는 방향의 미술을 했어요. 그러다 졸업전시 때 빛을 주제로 영상 작업을 하게 됐어요. 고양이 눈에서 나오는 빛이나, 소설에서 빛이 쓰인 장면을 다시 찍어 보기도 했고, 인공의 빛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빛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큰 주제여서 선생님들이 좋아하진 않으셨지만요. 하다못해 작업이 예쁘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취직을 위해 LED며 인테리어, 도면 등 다양한 기술을 배웠는데, 일자리가 없을 뿐더러 원하는 기술도 달라서 막상 원하는 곳에 들어가기가 힘들었어요. 고민하던 중 창업지원 공고를 보고, 당장 원하는 조명 회사에 들어갈 수 없다면 포트폴리오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부랴부랴 조명 다섯 개를 만들어서 지원했고, 다행히 선정되어서 세 달에 100만 원 지원금을 받게 된 게 시작이었어요. 글로리홀이라는 이름도 그때 지었고요.

글로리홀은 공방에서 유리가 식지 않게 도와주는 튜브인데, 800~1000도 사이의 큰 불이 돌아가는 터빈 형태예요. 생긴 것과 다르게 이름이 너무 예쁘죠. 사람을 매료시키듯 계속 불을 보게 되는데, 그래서 ‘매료시키는 불’이라는 의미로 글로리홀이 딱 좋다고 생각했어요.




Episode.3  연결의 매개체



Q.
요즘 관심 주제나 고민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A.
유리의 물성에 관심이 많은데, 아이러니하게도 유리를 하면서 꼭 이게 실제 유리여야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가 디지털에서 현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안에서 유리가 구축되는 방식도 굉장히 흥미롭고요.

디지털과 그래픽은 표면으로만 구성되잖아요. 알맹이가 없고 매쉬라는 표면만 있는데, 물론 두께를 형태화할 수는 있지만 그건 가상의 두께고 사실은 그조차 표면이거든요. 저는 인간이 언젠가 디지털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웃음) 그럼 그건 표면화 되는 걸까? 그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겠죠. 렌더링 프로그램은 머테리얼의 자유도가 높아서 그냥 드래그하고 설정하는 것만으로 성질이 바뀌거든요. 개성이 없는 물체에 나무 머테리얼을 입히면 나무가 되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디지털에서의 표면을 이야기하다 보면 유리의 표면과도 관련이 깊다는 걸 깨닫게 돼요. 유리가 우리에게 표면을 제공해주거든요. (핸드폰 액정을 두드리며) 이것도 유리잖아요. 그러니까 유리는 연결의 매개체인 거죠.

그렇다면 디지털 안에서의 죽음은 무엇이고 잠을 잔다는 것은 무엇일까? 혹은 인간이 디지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때는 어떤 표면이 중요해지고, 거기에서 유리의 표면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요즘 제가 하고 있는 고민들은 이런 거예요.




Episode.4  독일에서 알게 된 취향



Q.
독일로 교환학생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A.
디자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산업디자인을 배우러 독일로 교환학생을 다녀왔어요. 그런데 그러면서 느꼈던 건 디자인과 미술은 너무 다르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미술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요.

프로세스가 너무 달라요. 저는 디자인의 가치를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 프로세스가 저에게 도파민을 발생시키지는 않는 것 같아요. 훨씬 더 치밀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도 내 동기와 내 감정보다는 그걸 객관화시키는 게 훨씬 중요하거든요. ‘이러이러한 걸 디자인하고 싶어요.’ 라고 말하면 단박에 ‘왜 이런 걸 생각했는데?’ 하는 질문이 돌아오는 식이에요. 그럼 저는 또 거기에 맞게 이건 사람들의 욕구가 있기 때문에, 저건 또 저렇기 때문에, 하는 답변을 생각해야 하고요. 거기에 ‘나’는 별로 없어요. 디자이너로서의 영역이 굉장히 오브젝트화 된 경향이 있죠.

반면 미술은 점프가 가능해요. ‘왜’는 작가의 영역이니까요. 그 대신 미술은 또 다른 부분에서 치밀함을 추구하고요. 그렇게 디자인과 미술의 프로세스가 되게 다른데, 저는 미술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Episode.5  양산화와 정체성



Q.
최근 양산화 프로젝트를 시작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건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A.
‘고스퍼 캐스퍼’라는 작업을 조명 회사와 같이 양산화하는 과정에 있어요. 글로리홀을 대표하는 조명인데, 7년이나 됐지만 양산화 프로젝트는 처음이에요.

제가 만든 조명은 하나의 아트피스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쓴다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너무 밝지 않게끔 조도를 조정하고, 책상에 올려 둘 수 있는 정도의 무게와 크기로 만들고,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스위치를 다는 식으로 사용성의 지점들을 많이 고민했어요. 그런데 2019년부터는 미술로써 비평적인 지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좀 더 다양한 작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작년부터는 박혜인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을 하고 있고요.

그렇게 두 가지 채널로 나뉘고 나니 글로리홀의 성격은 조금 더 상업화 되고 양산화 될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요. 미술적인 관점에서 박혜인이라는 정체성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글로리홀에서는 더 자유롭게 대중성을 가미해보려고요. 두 가지 채널에서 각각 어떤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지 기대가 돼요.






Episode.6  헌신적인 가치



Q.
혜인님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나요?
A.
디자인의 예술적 가치만큼이나 사람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헌신적 가치에 관심이 많아요. 그게 제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 중 하나고요. 미술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더 낫게 만든다는 게 저에게는 중요한 동기거든요.

그래서 박혜인은 박혜인대로 미술 작업을 할 거고 글로리홀은 글로리홀대로 조명을 만들겠지만 이런 가치는 공유했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박혜인이라는 사람이 유리 작업을 하지 않거나 혹은 디지털만 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이 가치를 항상 염두하고 있으면 그건 그냥 형태만 다르게 발현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미술사 안에서 비평적인 활동을 하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이에요. 계속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지는 거죠. 미술의 영역이다 보니 속도가 느릴 수는 있겠지만, 그게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면 좋겠어요.




Episode.7  도파민



Q.
혜인님에게 중요한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A.
키워드로 표현한다면 도파민이 떠올라요. 도파민은 제가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죠. 그게 떨어지면 삶이 지루해지고요. 저에게 도파민이 나오게 만드는 건 사람이기도 하고, 작업이기도 해요.

9월에는 ‘아르스 일렉트로니카’라고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국제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의 온라인 전시에 참여하게 되어서 도파민이 샘솟고 있어요. 저희 학교와의 파트너십이 있어서 참여하게 된 건데, 제가 관심 있게 연구하고 있는 유리, 생명, 테크놀로지(디지털)라는 주제를 웹상에서 구현하는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또 매년 문래예술공장에서 하는 지원사업에 선정되어서 오늘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왔어요. 시각예술은 두 명을 뽑는데, 제가 선정됐다는 걸 듣자 도파민이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11월에 ‘매쉬 리퀴드 써페이스’라는 제목의 설치, 미디어 퍼포먼스 작품으로 개인 전시를 열 예정이에요.

무엇보다 글로리홀 하면서 가장 도파민이 많이 나오는 건 작업을 보여줄 때예요. 인스타그램에 작품을 올리고 사람들이 좋아해줄 때, 작업물을 사간 사람이 그걸 얼마나 소중하게 대하고 있는지 보여주거나, 작업물을 받고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저에게 알려줄 때면 정말 도파민이 넘치는 것 같아요. (웃음)

예전에 제가 만든 술병과 잔으로 술상을 차려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전시를 한 적이 있거든요. 그걸 진행하면서 ‘유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사람들이 제 유리를 좋아했거든요. 그런 게 제 도파민의 원천이 돼요.




Episode.8  덥고 습했던 아지랑이 같은 시절



Q.
가장 인상 깊었던 작업이 무엇인지 듣고 싶어요.
A.
2019년에 ‘람한’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와 함께 ‘고스트 샷건’이라는 전시를 했어요. 서로의 영역이 겹치지 않으면서도 잘 어울려서 너무 잘 맞았죠. 진짜 재미있었어요. 5일 정도 되는 짧은 전시 기간 동안 사람들이 엄청 많이 왔거든요. 게다가 덥고 습한 날씨까지, 모든 순간이 아지랑이처럼 갑자기 출몰했다가 유유히 사라지는 기분이었어요. 유령이라는 컨셉과도 정말 잘 어울렸죠.




Episode.8  박혜인의 로피스: 유려한 생명체



Q.
로피스로 이 유리 조각을 뽑아주셨는데, 이유가 무엇인가요?
A.
처음 만든 작업은 아닌데, 이 형태에서 모든 게 출발한 것 같아요. 유리를 생각했을 때 이 유려한 형태에서 뭔가 유리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이 곡선,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생명체 같다는 것, 그리고 뜨거울 때 이것이 움직였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이 형태 안에 모든 게 다 있고, 제가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형태이면서, 모든 개념이 여기서 출발하는 것 같아요. 내가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나도 모르게 만들어지는 어떠한 형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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