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Sunghye


Intro

파도의 거품들 김성혜


Episode.1

파도의 거품들: 사라질 걸 알면서도 계속 시도하는


Episode.2

방어적 즉흥


Episode.3

다정함과 냉정함 사이의 협업


Episode.4

블로그


Episode.5

식물과 책


Episode.6

김성혜의 로피스: 스펀지, 저지르고 수습하는 일


Episode.7

개인적인 몸짓


Episode.8

그냥 좀 건강하게, 계속







Intro

파도의 거품들 김성혜



태어나기 훨씬 전의 과거나, 먼 미래의 환상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김성혜의 고요하고 차분한 목소리 뒤에는 외부의 자극에 맞서 자신의 것을 표현하려는 에너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하는 힘. 가장 야생적이고 원초적인 방법으로, 가장 개인적인 몸짓을 자기 세계로 확장하고 있는 김성혜를 만났다.



Episode.1  파도의 거품들: 사라질 걸 알면서도 계속 시도하는



Q.
‘파도의 거품들’은 어떤 의미인가요?
A.
오래 전 스무 살 겨울에, 속초 바다에서 지은 이름이에요. 엄청 춥고 파도가 거센 날이었어요. 너무 오랜만에 바다를 봐서 그런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죠. 파도가 철썩철썩 치는 게 반복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어요. 파도가 밀려와서 부딪치고, 부슬거리며 사라지고, 다시 밀려오고, 사라지고, 그게 끊임없이 반복되고……. 사라질 걸 알면서도 계속 시도하는 것처럼 보여서 인상적이었어요. 그게 제 작업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고요. 그때 브랜드 이름을 '파도의 거품들'로 짓겠다고 결심했어요.



Q.
작업은 그럼 그때부터 시작했던 건가요?
A.
작업은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어요. 중학교 때 홈스쿨링을 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끄적거리는 걸 좋아했거든요. 심심할 때마다 그림을 그려 블로그에 올렸어요. 작업이 쌓이다 보니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지더라고요. 전시나 마켓에도 참여하게 됐고요. 자연스럽게 활동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Q.
어떤 작업을 좋아하세요?
A.
어렸을 때부터 고대 유물이나 동굴 벽화 보는 걸 좋아했어요. 제가 고대의 사람처럼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고요. 불을 피우고 행하는 의식에서 기도하고 염원하는, 그런 야생적인 분위기에 마음이 끌렸어요. 고대의 그림은 거칠고 까슬까슬하고, 때로는 너무 원초적이어서 사람을 두렵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온화하게 품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우리를 위협하다가도 또 한없이 품어주는 자연처럼요. 저도 그런 양면적이고 입체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Episode.2  방어적 즉흥



Q.
작업할 때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평소 즉흥적으로 작업하는 편인가요?
A.
맞아요. 그렇다고 어떤 영감을 받아서 즉흥적으로 표현하는 건 아니고, 일상의 기억을 토대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페인팅과 세라믹 작업을 주로 하고 있고요. 손에 잡히는 것으로 그리다보니 자연스럽게 페인팅을 시작했고, 제가 좋아하던 일러스트 작가님이 그릇에 페인팅한 걸 보고 반해서 세라믹을 시작했어요. 처음 공방을 다니기 시작한 게 열여덟 살 때였어요.



Q.
어렸을 때도 즉흥적으로 활동하고 결정하는 성격이었나요?
A.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걸 향해 달려가는 성격은 아니에요. 오히려 수그린 상태라고 해야겠죠. 분위기나 감정도 주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적응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외부의 자극 때문에 웅크리고 있으면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잖아요. 저의 즉흥은 그럴 때 괜찮아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에 가까워요. 사방으로 뻗어나가기보다는 방어적이죠. 원래 사람이 예민하고 부정적이다 보니 (웃음) 작업하다가 안 될 것 같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즉흥적으로 시도하던 것이 습관이 됐어요.

그래서 작품이 의도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가더라도 그냥 완성시키는 편이에요. 흙으로 작업하다 보면 추구하는 방향과 다르게 변하거나 휘어지는 경우도 생기거든요. 그럴 때 망했다고 다시 뭉쳐버리기보단 ‘이렇게 됐나 보네.’ 하고 마무리 지어요. 도자기는 특히나 불에 영향을 많이 받거든요. 제가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 적다 보니 강박적인 마음을 많이 내려놓게 됐어요.







Episode.3  다정함과 냉정함 사이의 협업



Q.
지금까지 했던 작업 중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작업이 있나요?
A.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전자음악가 장명선 씨의 뮤직비디오를 작업했을 때예요. 사실 장명선 씨는 블로그를 통해 친구가 된 음악가에요. 명선 씨가 정규 1집을 낼 때 수록곡 <이다음에는>이라는 곡의 뮤직비디오 제작을 제게 제안했어요. 영상이나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해선 아는게 없어서 또 다른 친구였던 작가 유민하씨와 협업해서 만들었죠. 민하 씨는 일러스트와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작가에요.

그때가 거의 첫 협업이었는데, 세 명 모두 여성 작업자이고, 나이도 같아서 함께 으쌰으쌰 하며 만들었던 기억이 나요. 과정도, 결과물도 아주 좋았고요. 그림이나 도자기 작업은 아무래도 정적일 수밖에 없는데, 뮤직비디오에서 제 그림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고 즐거웠어요.(웃음)



Q.
단체전이나 협업 전시를 많이 하는 것 같더라고요. 자주 참여하는 이유가 있나요?
A.
협업을 좋아해요. 홈스쿨링을 해서인지 동료나 친구, 언니 동생 같은 관계에 로망이 있기도 했고요. 저는 혼자 오롯이 모든 작업을 해내는 데 익숙한데, 다른 작가 분들과 함께 작업을 해보니 조율할 것도, 상의할 것도 많더라고요. 그러다 보면 서로 한없이 다정해지기도 하고, 냉정해지기도 해요. 그런 다이나믹이 재미있었어요. 함께 작업을 하다 보면 저 혼자서는 만들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이 나오는 것도 좋았고요.




Episode.4  블로그



Q.
블로그를 오래 하셨다고 들었어요.
A.
한 10년 정도 했어요. 연락이나 섭외도 많이 받았고, 지금 함께 작업하는 분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는 매개가 되기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정리했어요. 너무 어렸을 때부터 해온 데다 사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보니 예전 기록들을 보기 힘들더라고요. 소통하거나 친목하기보다는 일기장처럼 쓰기도 했고요.

다만 그러다 보니 제가 어떤 사람인지 훨씬 잘 드러나서 성향이 잘 맞는 작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죠. 제 작업물뿐만 아니라 저라는 사람 자체를 이해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사람 대 사람으로 연결될 수 있었으니까요.




Episode.5  식물과 책



Q.
도자기와 페인팅 외에도 식물을 기르고 책을 출판하기도 하는데, 어떻게 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A.
처음에는 식물을 키우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는데, 기르다보니 하나하나에 애착이 생기더라고요. 꼭 맞는 무언가를 만들어주고 싶은데, 제가 도자기를 하니까 화분을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옷 입혀 주는 것처럼요. (웃음) 그렇게 하나, 둘 만들다보니 많아져서 판매도 생각하게 됐어요.

책은 제 로망이었어요. 유명 작가의 도록이나 아트북을 갖고 싶었고, 그만큼 누군가 내 작품으로 만든 아트북을 갖고 싶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죠. 책의 고전적인 느낌을 좋아하기도 했고요. 제 10대 중후반은 유어마인드를 비롯한 독립출판이 시작되던 시기이고 실험적인 책도 많이 나와서 영향을 받기도 했어요. 이것저것 다양한 작업을 하지만 산발적이진 않아요. 오히려 하나의 작업에서 연결되거나 확산시킨 경험이 많았죠.






Episode.6  김성혜의 로피스: 스펀지, 저지르고 수습하는 일



Q.
성혜 님의 로피스는 무엇인가요?
A.
저는 스펀지를 골랐어요. 오래 고민했는데 제게 꼭 필요한 거라면 얘가 맞겠다 싶더라고요. 워낙 다용도로 쓰기도 하고, 특히 도자기 작업할 때는 꼭 필요하거든요. 즉흥적으로 작업을 하다 보면 흙덩어리를 마구 주무르거나 깎아놓을 때도 있는데, 그런 부분들을 마지막에 다듬어주는 게 스펀지예요. 누가 봐도 ‘이건 너무 막 했다.’ 싶은 부분을 융화시켜주는 거죠. (웃음)

스펀지로 다듬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기도 해요. 마지막 단계에서 모든 걸 수습하는 느낌이 있잖아요. 열심히 다듬다 보면 생각이 비워지고 마음이 좀 편해지기도 하고요. 꼭 다듬을 때가 아니더라도 페인팅 할 때도 유용한데, 물감을 묻혀서 스펀지로 문대거나 스텐실 기법으로 찍어낼 때 써요. 청소할 때나 설거지할 땐 말할 것도 없고요. 거의 만능이에요. (웃음)






Episode.7  개인적인 몸짓



Q.
작업을 꾸준히 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A.
저는 제가 하는 작업이 너무나도 개인적인 몸짓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을 바꿀 거야’ 같은 욕심은 전혀 없고요. 그런데 제 작업이 자신과 같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아주 개인적인 걸 꺼내 놓았는데 ‘나도 그래. 너의 작업을 보면서 울림을 느껴.’라는 반응이 오는 게 참 이상했어요. 그런 것들이 제가 계속 작업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거대한 담론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살아.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데 어떤 것 같아?’ 정도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그게 누군가에게는 원초적이고 거센 파도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거고요. 한편으로 저에게는 제가 살아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돼요. 그런 작업 끝에 나온 결과물이 좋은 분을 만나서 소중하게 다뤄지는 걸 보면 안심이 되기도 하고요. 그 분만의 개인적인 무엇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아요.




Episode.8  그냥 좀 건강하게, 계속



Q.
앞으로 어떻게 작업하고 싶은지 듣고 싶어요.
A.
그냥 좀 건강하게? (웃음) 저는 꾸준히 하던 걸 계속 하는 사람이라 변화의 폭이 크지 않아요. 그런데 친구가 어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너는 뭘 안 하면서 사는 것처럼 보여서 걱정이 됐는데 어느 순간 보면 ‘나 전시해.’, ‘나 해외 다녀왔어.’ 이런 큰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온다고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저도 제 변화가 느껴졌어요. 운전면허를 따고, 작업실이 생기고, 어느 순간 성장한 것 같이요. 앞으로도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돌아가는 것처럼 계속 이렇게 지내려고 해요.

해보고 싶은 작업은 많은데 지금은 도자기에 집중할 생각이에요. 도자기만으로도 공부하고 시도해볼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다양해서요. 유약이나 가마 다루는 법을 더 알고 싶기도 하고요. 완전히 다른 방향을 시도하기보다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완성도 있게 다져 나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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